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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3:11-14 빛의 갑옷을 입으라

관리자 0 2,072 2021.05.17 12:44
롬13:11-14  빛의 갑옷을 입으라

  잠자는 사람은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 합니다. 보여 주어도, 볼 수 없습니다. 잠이 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귀한 말을 해주고 좋은 것을 보여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다. 죄악의 잠을 자는 것도 그렇습니다. 죄악의 잠에 빠진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돈 꿈을 꿉니다. 그래서 돈돈돈 하고 살아갑니다. 돈밖에 모릅니다. 돈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영어로 돈은 ‘머니’ 라고 하지요. 한글에도 머니가 있습니다(코리안 유머).
계란 살 때 주는 돈을 ‘에그머니’, 도둑이 훔처가는 돈은 슬그머니, 며느리가 싫어하는 돈은 시어머니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돈 꿈을 가장 많이 꾸는 것 같습니다. 머니 만 쫓아가다가 인생 낭비하고, 낭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쾌락을 꿈꾸는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쾌락에 잠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월드 얼머낵(World Almanac) 잡지에서 미국의 중학생들 2천명에게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자기가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추앙인물"이 누구냐? 그런데 대다수의 학생들이 연예인(TV배우, 개그맨, 가수 등) 그리고 운동선수를 추앙인물로 썼습니다. 그리고 여자 추앙인물은 겨우 5명 나왔는데 그들도 역시 배우, 패션모델, 가수들이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정치가, 과학자, 저술가, 예술인, 성직자 등을 추앙인물로 썼었는데 그런 이름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크게 걱정하면서 해리스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정말 가치있는 인생성취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세대가 되었다. 가치관과 도덕적 수준이 여기서 더 떨어진다면 경제와는 관계없이 이 사회는 스스로 붕괴될 것이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이런 세대에 경종을 울려주는 말씀입니다. 다같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1. 깨어나라(11)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우리가 자다가 깰 때가 언제입니까? 어린아이들 소변 마려울 때, 새벽에 여행 떠날 때, 일출 보려고 새벽에 깰 때이다. 새벽에 나가는 낚시꾼들. 그러나 성경에서도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종말론적 각성을 촉구합니다. 영적인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맑은 정신, 민감한 마음으로 살 것을 촉구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 13:37). 내 신앙생활 중에 잠들어 있는 것을 깨워야 합니다. 혹시 기도가 잠들어 있습니까? 전도와 선교가 잠들어 있습니까? 예배가 잠들어 있습니까? 내 안의 사랑이 잠들어 있습니까? 구제가 잠들어 있습니까? 봉사가 잠들어 있습니까? 깨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막 14:37-38상)고 명령하십니다.
잠들어 있으면, 아무리 큰 은혜가 임해도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잠자고 있는 신앙을 깨울 수 있을까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첫 사랑, 첫 신앙을 회복하면 됩니다. 그때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모여서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금식을 했습니다. 헌금을 할 때도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께 무엇이든 더 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누구 말처럼 도박장에서 밤새는 사람들은 눈을 반짝이면서 밤을 새워가며 온 정성을 쏟습니다. 어떤 분은 도박  때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면 호텔 방에 들어 가서 목욕재개하고 맑은 정신으로 도박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도박하는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는데. 정작 정신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우리 성도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도박하는 사람들, 밤새 바둑 두는 사람들 만큼만 우리의 귀중한 영혼들을 위하여 정성을 기울였다면 교회는 크게 부흥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더 정신을 차립시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 다시 한번 영적 각성이 필요합니다

영적 각성을 위하여는 먼저 시기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시기는 구원의 날(재림의 날)이 가까웠다는 긴박감이 느껴지는 시기입니다.  말세의 뚜렷한 징조들, 자연질서 파괴, 인간의 질서 파괴, 전쟁, 기근, 지진, 불법 성행, 사랑이 식어짐 등이 가득합니다.
시간이라고 다 똑 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학생들이 느끼는 시간과 노인 들이 느끼는 시간은 다릅니다. 시간가는 것이 아쉽지 않습니까? 노인들의 마음 은 더욱 간절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긴박감이 필요합니다. 암선고를 받고 생명이 6개월 밖에 안 남았다면 더 절박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듭니까? 시간의 긴박감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시한부 인생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살겠습니까? 이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지혜의 바탕위에서 영적인 각성을 촉구합니다. 지금 느긋하게 살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험날자만 가까워져도 잠이 오지 않는데 천국을 코 앞에 두고 사는 우리가 잠만 자서야 되겠습니까? 지금은 자다가도 깰 때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는 소원은 선교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선교에 깨어날 시간입니다.

2. 어두움의 일을 벗으라(12).
12절을 보십시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영적으로 각성하고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려야 하겠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너희들이 할 일은 어두움의 옷을 벗고 빛의 옷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또 어두움의 옷을 벗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13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 어두움의 옷을 벗기 위해 해야 할 네 가지가 있습니다.  1) 낮에와 같이 단정한 삶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밤의 삶은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무슨 옷을 입었는지 무슨 얼굴색을 하고 있는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낮에는 잘 보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한 삶이란 성결한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삶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어두 움의 부분을 제거해야 합니다. 2) 방탕하거나 술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빛의 삶을 살라. 3)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 당시에 로마의 상류사회가 얼마나 쾌락과 음란으로 타락했었는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4)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툼과 시기입니다. 우리 사회는 다툼과 시기로 얼룩져 있습니다. 거기에 한 가지 더해 마약이 있습니다. 세상은 마치 밤에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미움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어두움의 일을 벗지 않으면 심판이 옵니다. 심판이라는 말은 겁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주도, 심판도, 지옥도 사실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14).
14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빛의 옷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 분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도 아담과 하와를 위해 손수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라고 했습니다. ‘오직’이라는 것은 단 하나 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죄악의 옷을 벗었을 때 우리가 입어야 할 영광의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 밖에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는데 교인들의 눈치가 이상했습니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그만 런닝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나온 것 입니다. 저도 한국에서 새벽기도회 때 양말을 바꿔 신을 때가 있습니다. 어둔 곳에서 양말을 신으니까 한쪽은 검정색이고 한쪽은 파란 양말을 신을 때가 있습니다.
 옷이란 맞추어 입어야 합니다. 특별히 예복은 모든 것이 다 격식에 맞아야 합니다. 결혼하려면 드레스를 입어야 하고, 일하려면 작업복을 입어야 하고, 군인이 되려면 군복을 입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려면 예복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믿음의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또 의로움의 예복, 진리의 예복을 입어야 하며, 거룩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 예복은 모든 것을 갖추어 입어야 합니다. 양복을 입을 때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잘 다려진 바지와 상의를 입습니다. 허리에 벨트를 매고, 양복과 어울리는 양말을 신고, 잘 닦여진 구두를 신어야 합니다.

우리는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사람은 행복에 대한 부푼 꿈을 꾸며 결혼하는 신부입니다. 양복이 길게 늘어지고 뒤가 갈라진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훌륭한 음악을 들려줄 지휘자입니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넥타이를 매고 있는 불쌍한 사람은 외판사원 아니면 목사님 입니다. 또한 사람은 상황에 따라 다른 옷을 입습니다. 잠을 잘 때는 잠옷을 입고, 평상시에는 평상복을 입고, 운동을 할 때는 운동복을 입고, 예식을 할 때는 예복을 입습니다. 이와 같이 직업에 따라, 때를 따라 다른 옷을 입고 살아가듯이.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시민이요, 성도가 된 우리들은 성도의 신분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거지와 왕자' 라는 동화를 아실 겁니다. 하루는 왕자가 너무 왕실의 생활이 답답해서 거지와 옷을 바꿔 입었습니다. 그러나 거지가 왕자의 옷을 입었지만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왕자의 옷을 입은 거지가 왕자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또 거지의 옷을 입은 왕자가 거지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옷이 그 사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옷이 날개입니다. 그러므로 거지가 왕자의 옷을 입으면 안 되고, 왕자가 거지의 옷을 입으면 안 됩니다. 자기의 신분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도 우리의 신분과 직위에 알맞는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렇게 벌거벗으면 안 됩니다.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성도 여러분!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 택함을 입고 부르심을 받아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입는 의와 진리의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누더기 같은 세상의 옷을 입고 있다면 빨리 갈아입어야 합니다. 노동자는 일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작업복을 갈아입습니다. 판사는 재판 시간이 다가오면 법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신부는 예식 시간이 가까워 오면 하얀 드레스로 갈아입고, 신랑은 예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주님 앞에 서야할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누더기와 같은 더러운 세상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의와 진리의 거룩한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예전에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왕은 왕이 입을 옷이 따로 있었고, 귀족은 귀족의 옷을 입어야 하고, 평민은 평민을 나타내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군인은 군인 옷, 군복을 입었고, 판사는 법의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은 죄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옷은 그 사람을 말합니다. 옷은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옷이 그 사람입니다. 어떤 옷을 입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말씀하면서 14절의 말씀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 우리가 살았던 인생을 반드시 보고 하게 되어있고, 그 삶의 결과를 책임지게 되어있습니다. 인생을 보는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인생을 관광으로 보는 것과 인생을 출장으로 보는 것 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관광으로 봅니다 그래서 자기의 삶의 기간을 최대한도로 연장시켜서 최대한의 재미를 보는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옳지 않습니다. 인생은 관광이 아니라 출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이 세상에 보내 주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다 산후에 하나님 앞에서 인생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 합니다. 출장
가서 좋은 결과를 얻어오면 성과에 따라 보상이나 승진이 있을 것입니다.
<천상병,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행복) 귀천/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갈수록 세상의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젊은이들이 이겨내지를 못 합니다. 요즘 세대들을 보면 마치 파리가 꿀맛에 도취되어 빠져 죽는 줄도 모르고 꿀통에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죄악을 향해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의 빛이 내 마음에 찾아오면 어두움은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두움을 몰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빛을 받아들일 때 능력은 있습니다. 내가 어두움을 몰아낼 수는 없지만 빛이 내 안에 오면 그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줄 믿습니다.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늘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그분이 오시면 내안에 있던 모든 어두움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성도들이 빛 가운데서 서로서로 세워 주기 위하여 있습니다. 매주일 모이는 조직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모이는 조직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군복으로 옷 입은 군사들이 마음을 모으면 못할 일이 없고 변화 시키지 못할 것이 없을 것 입니다. 자기의 약점관리만 잘하면 됩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아킬레스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불사신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스탁스 강에 넣을 때 발꿈치를 잡고 넣는 바람에 …유일하게 불사가 아닌 발꿈치가 약점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아킬레스 건은 발꿈치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가리킬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킬레스 건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점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삼손의 유혹, 솔로몬의 유혹, 유다의 유혹은 누구에게도 있는 것 입니다. 이런 유혹이 판을 치는 말세에 깨어 기도하며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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