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 42:1-20, 거룩하라
에스겔서는 흔히 읽기 어렵고 낯설게 느껴집니다. 화려한 환상들, 이상한 비유들, 멸망과 심판의 메시지가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42장은 성전 환상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포로지에 있던 에스겔에게 새 성전을 보여주셨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은 무너져 있었고, 그들의 신앙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성전 환상은 단순히 설계도가 아니라,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였다.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포로 중에도 함께 하신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불타 황폐하게 된 조국에도 회복이 올 것이다. 하나님이 다시 우리 가운데 거하실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성전 안에 있는 제사장들을 위한 특별한 방들입니다. 이 방들의 용도는 무엇인가? 13,14절, “13.그가 내게 이르되 좌우 골방 뜰 앞 곧 북쪽과 남쪽에 있는 방들은 거룩한 방이라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에서 먹을 것이며 지성물 곧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니 이는 거룩한 곳이라. 14.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 하더라.” 3 가지를 말씀한다. 1) 제사장이 거룩한 제물을 먹는 장소이다. 2) 제물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3) 제사장이 거룩한 예복을 갈아입는 장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굳이 에스겔에게 이 방들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방들에 대한 호기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성전, 우리의 구별된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1. 거룩하게 살아라,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라(1–14)
앞부분에는 제사장들을 위한 방이 등장합니다. 성전 북쪽과 남쪽에 길게 늘어서 있는 건물, 그곳은 단순한 숙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거룩한 제물이 보관되고, 제사장이 그 음식을 먹고, 제사 의복을 갈아입는 공간이었다. 즉 거룩한 일을 준비하는 방이었다. 13, 14절에 거룩이라는 단어(카도쉬)가 8번이나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방은 누구나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백성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오직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 제사장은 그곳에서 속죄 제사와 관련된 일을 준비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거룩은 그냥 생겨나지 않습니다. 거룩은 하나님께 속하기 위해 구별되어야 합니다. 신약 성도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으로 부름받았다. 따라서 이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도 마땅히 구별된 영역이 있어야 한다. 시간의 구별하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매일 기도의 시간을 따로 떼어 놓는 것이다. 물질을 구별하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따로 구별해 드리는 것이다. 십일조를 드리고, 주일예배 시마다 하나님 앞에 빈손 아닌 주일헌금을 드린다. 출 23: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삶을 구별하라. 세상 속에서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이 너무 세상과 뒤섞여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하니까 괜찮다”는 생각 속에서 구별됨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에스겔이 본 제사장의 방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구별하고 있느냐?”
2. 하나님의 임재 앞에는 준비와 질서가 필요하다 (15–20), 본문 후반부에서는 성전 전체를 측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성전의 길이와 너비, 담을 측량합니다. 그리고 성전과 성전 밖이 철저히 구분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 하나님은 굳이 이런 측량 과정을 보여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성전의 담은 단순한 벽이 아니라, 거룩함과 속됨을 구별하는 경계선이었다. 20절, “그가 이같이 그 사방을 측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하나님의 임재는 아무렇게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반드시 준비가 필요하고, 질서가 지켜져야 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러 오면서 얼마나 준비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정결하게 하며 오고 있습니까? 한 주간 말씀대로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며 오십니까? 하나님 앞에 드릴 찬양과 감사의 마음을 준비하며 오십니까? 많은 경우 우리는 아무런 준비 없이 예배당에 들어온다. 그냥 습관적으로 앉아 있고, 찬양을 부르고,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을 세밀하게 측량하시며, 우리 마음을 동일하게 측량하십니다. “너의 마음은 준비되었느냐?” 물으십니다.
3. 예수님이 완성하십니다 – 우리 자신이 성전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성전의 의미는 완전히 새로워졌다. 이제 성전은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성령께서 거하시는 우리 자신입
니다(고전 3:16). 에스겔이 본 제사장의 방은 우리 안에서 이렇게 성취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곧 거룩한 방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곧 성전의 기구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내 마음은 거룩한 방으로 준비되어 있는가? 내 삶은 성령께서 편히 거하실 수 있는 성전인가? 내 일상은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제사와 같은가? 주일에만 잠시 거룩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진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당 안에서는 “아멘”을 외치면서도, 집에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직장에서는 부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성전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곧 나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삶을 거룩하게 지켜라.”
결론입니다. 본문은 단순한 설계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임재의 위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오늘 세 가지 말씀하신다. 1) 세상과 거룩하고 구별되게 살아라고 하십니다. 2) 하나님의 임재에는 준비와 질서가 필요하다. 신약의 성전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여러분, 우리 각자가 성전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과 삶을 측량하신다. 우리 가정, 직장, 인간관계,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준비되어 있는가? 3) 오늘 우리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성전이 되기를, 구별되고 준비된 거룩한 성도로 세워지길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적용 질문, 나는 내 삶에서 하나님을 위해 어떤 영역을 구별해 두고 있는가?(시간, 물질, 관계, 말 등) 나는 주일예배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내 마음과 삶을 측량하신다면, 그 안에 거룩함과 속됨이 분명히 구별되고 있습니까? 나는 가정과 직장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교훈입니다. 첫째,제사장들의 방과 성전 안마당에 관한 환상은 성전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거룩함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 준다. 제사장들의 방은 구별된 거룩한 공간으로써 제사장들은 그곳에서 거룩한 예복을 입고, 하나님을 섬길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제사장인 성도들의 구별된 모습과 섬김의 태도를 말해 준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영적 제사장들이다(벧전 2:5,9).
둘째, 에스겔이 본 제사장들의 방과 성전 안팎을 구분하는 담의 길이를 재는 환상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신자와 불신자, 거룩한 생활과 세속적인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영적 제사장인 성도들은 항상 거룩한 믿음의 예복을 입고 정결하며 거룩한 생활에 힘쓰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로 살이야 함을 교훈한다. 주일을 성수해야 합니다. 예배 때에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거룩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 헌금, 전도 등 일체의 행위는 더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구별된 표시이다. 이런 구별된 행위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를 나누는 영적 담장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준비된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먹는 것,입는 것, 사용하는 것 등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규례 안에서 공급된다. 이는 영적 제사장인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구원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준비된 자세로 살아야 함을 교훈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도 잘 감당해야 하지만 구별되고 거룩한 삶의 영적 담장 아래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
종말에 거룩하게 살라고 하십니다(계시록).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동일한 주제들(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분과 희생)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에스겔이 주장했던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여전히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구분되어 있다. 새 예루살렘, 천국을 둘러싸고 있는 담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심지어 더 높이 올라갔으며 심지어 더 두꺼워졌다(계21: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약65m)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에스겔 성전의 담 높이는 3.2m 정도. 약 1/20.
그러나 이제 에스겔의 수많은 담들 대신에 거기에는 오직 한 개의 담만이 있다 그 마지막 구분은 의로운 자와 의롭지 못한 자 사이에 행해졌다. 의로운 자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21:27)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22:14)은 그 성의 문을 통과하여 바로 중앙까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생명나무까지 완전히 자유롭게 들어가게 된다(22:2,14). 불의한 자들, 두려워하는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하는 자들(21:8,27; 22:15), 이 사람들은 모두 영원히 성 밖에 있을 것이다(22:15).
그 도성에 성전과 담이 없는 이유는 그 성 전체가 거대한 지성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최초의 성막처럼 정육면체 모양이며(계 21:16) 정금으로 덮혀 있다(21:18). 에스겔의 성전에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에스겔 자신조차도 들어가지 못했던 그 장소는, 새 예루살렘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이다. 에스겔의 성전과달리 그 "새 세상”에는 제단이 없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희생제사를 치렀기 때문이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했고 죽음에서 살아나셨으며 이제 하늘의 예배 중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