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십계명학교 - 5계명

관리자 0 4,099 2019.09.02 11:50
출 20:12, 신 5:16; 엡 6:1-3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오늘TV 광고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흘러간 옛 노래 Let it be!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거기에 영상 자막이 있습니다. “아줌마는 대강 옷을 입는다. 아줌마는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다. 아줌마는 벌레 쯤은 그냥 잡는다. 아줌마는 저녁 잠이 많다. 아줌마는 힘이 세다.
그 다음에 나오는 멘트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아줌마의 다른 이름은 우리 엄마다. 저는 이 멘트를 볼 때 가슴이 찡 해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 다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다 그렇게 멋을 부리셨지만 결혼하고 난 다음에는 멋이라도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래요. 그 분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부끄러움도 많이 타셨지만 이제는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으세요.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벌레를 만나면 ‘어머머’ 하면서 놀라셨지만, 지금은 자식들이 벌레에 해를 당할까봐 쫓아다니면서 막 잡아잿깁니다. 그분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밤새워서 자고 오전까지 자고 그것도 부족해서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된 후부터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기도하고 말씀보고 우리가 깨워 일어나기까지 우리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하시네요. 또 결혼하기 전에는 무거운 것 들지 않으려고 하셨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허리가 상하도록 우리를 위해서 무거운 것을 드시고 섬기시네요.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쏟다 보니까 지난 날의 젊고 예쁘고 건강하시던 모습은 다 사라지고 늙고 병들고 힘 없는 모습만 남았네요. 이렇게 부모님들은 저희들을 위해 다 쏟으시다가 더 이상 쏟읠 것이 없을 때 말없이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를 불러 봐도 말이 없으신 분들이 참 많으십니다. 은 어머니주일입니다. 귀한 생명을 낳기 위해 고생하시고 키우기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들 위에 주님의 위로와 축복이 넘치길 기원합니다.
조선 시대 숙종 때 개성 근처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시골로 행차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임금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원근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의 한 노파가 아들에게 이렇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얘야, 내가 죽기 전에 임금님 얼굴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다.” “예, 어머니! 그러시지요.” 이 아들은 이 노모를 업고 자그마치 70리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임금님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는 위치로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마침 임금님이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묻습니다. “아 도대체 저 노파와 그를 업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구냐? 왜 거기 서 있는 거냐?” 그러자 효자는 말합니다. “어머니가 눈 감으시기 전에 임금님을 한 번 뵙고 싶다고 해서 여기까지 70 리를 업고 왔습니다.”  “그래, 참 효자로구나!”하고 후한 상을 내리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옆 마을에 사는 불효막심한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이 소문을 듣더니 그저 가지 않겠다고 하는 노모를 들쳐 업고는 임금님이 지나가시는 그 길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어요. 임금님이 지나가시다가 보고 말했습니다. “이 고을 근처에는 효자들이 많은가 보구나. 그래 너는 웬 일이냐?” 그랬더니, 옆에 동네 사람들이 말합니다. “아닙니다. 임금님, 이 놈은 불효막심한 사람입니다. 지금 임금님의 상 받으려고 저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이 껄껄 웃으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효도는 흉내라도 내어야 하느니라. 효도는 흉내라도 내어야 하느니라.” 하시고서 그 불효자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는 일화입니다.

  몇 년 전 대학생들을 상대로 효가 무엇인가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60%의 학생들이 ‘속 썩이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6.2%만이 그저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라고 응답했습니다. 정말 ‘공경’이라는 말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저 잡수실 것 챙겨드리면 그것이 효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분이 고등학생에게 물어보았어요. ‘너 삼강오륜이 뭔지 아느냐?’ 학생이 대답합니다. “아, 그것도 모르세요? 삼강은 한강, 낙동강, 금강이고요. 오륜은 그 올림픽기에 보면 오륜기가 있는데요. 오 대륙을 상징하는 것 아닌가요?” 참! 요즘 한국 젊은이들의 효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듯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어머니를 포함한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1. 주님은 부모에게 주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엡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부모에게 주 안에서 순종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옳다는 뜻은 ‘당연하다. 자연스러운 일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모든 자녀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이 자식들을 보호하려는 자연적인 본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자식이 부모의 말을 따르는 것은 언제나 유익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듣는다”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한 평생 키우면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야, 부모 말씀 좀 잘 들어. 말 좀 들어봐! 내 말 좀 들어, 들어 들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우리 부모는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자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할 때 이것은 자연의 순리이며 상식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실 이런 원리는 인간계뿐만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미가 갓 태어난 새끼를 돌보고 먹이를 줍니다. 이것이 자연스런 본능입니다.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어미는 새끼들이 걷는 것을 가르칩니다. 뛰는 것을 가르치고 나는 것을 가르칩니다. 먹이를 모으는 것을 가르치고 적과 싸우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해서 어리고 약한 새끼들은 부모를 따라가면서 부모의 도움과 안내와 교훈을 받습니다. 인간계도 동일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할 때, 부모의 말씀을 따를 때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도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자보다 불효자가 많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간적으로 노력해도 잘 안 됩니다. 순종하려면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공감이 가는 어떤 글이 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들을 추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부모에게 불효자는 없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나?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는 모든 자녀가 효자이다. 그분과 더 이상 감정적으로 얽힐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살아계신 부모님과의 관계이다. 사람들은 살아계신 부모님에 대해 미묘한 이중감정에 시달린다. 부모는 끝없이 파고들고 싶고 끝없이 찾고 싶은 고향 같은 존재이다. 그런가 하면 부모는 어떻게 하면 멀어질 수 있을까 생각하는 족쇄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살아계신 부모님들과는 감정적으로 얽힐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공감되세요. 이런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순종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상당히 부담스런 존재로 느껴집니다. 많은 자녀들이 분노하고 증오하고 섭섭해하기도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다고 그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마음의 상처 때문입니다. 많은 자녀가 부모로부터 상처를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부모에 대해 두 마음으로 갈라집니다. 순종하려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에 대해 수없이 들어도 이상하게 마음이 열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주안에서, 즉 주님의 놀라운 은혜 안에서 살 때 가능합니다. 
“자녀들이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계적인 전도자요 사회학자인 유명한 토니 캄폴로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합니다.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그가 살고 있던 동네는 아주 복잡한 동네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그가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횡단보도를 여러 번 건너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엄마가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2학년 때 급한 일이 생겨서 옆집의 상급생 누나에게 Tony를 학교까지 잘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상급생에게 용돈까지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누나를 따라서 학교에 잘 다녔습니다. 조금씩 그가 크면서 누나와 같이 가는 것이 쑥스러워졌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쪽 팔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엄마에게 불평을 하면서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엄마, 나 누나하고 같이 안 다녀. 누나에게 주던 용돈 나 줘. 나 혼자 학교 갈 거야.” 엄마가 아무리 설득해도 말을 안 들었어요. 마침내 엄마가 허락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학교에 다니면서 아주 재면서 자신 있게 다녔어요. 왜냐하면 자기 또래에 아무도 자기처럼 혼자 다니는 학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런 토니가 중학생이 되었어요. 어느 날 자기 집에 친척들이 모였어요. 토니는 자신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혼자 다녔다고, 자립심이 강하다고 자랑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시며 말했어요. "토니야, 내가 사실을 좀 애기할까? 네가 독립선언을 하고 네가 혼자 학교 다닌 순간부터, 네 자존심은 좋았을지 몰라. 용돈까지 받아가면서... 하지만 이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졸였는지 아니? 네가 혼자 다니겠다고 선언한 순간부터 무려 2 년 동안 나는 학교를 네 뒤에서 따라 다녔단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네 뒤에서 계속 따라다녔단다. 혹시나 엄마가 필요한 순간이 있을까봐.. 그리고 오후 3시 30분 학교가 마칠 때면 학교 코너에 너보다 먼저 와 있었어. 네가 집에 갈 때까지 나는 항상 뒤에서 따라다녔어. 그 시간이 나에게는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는지 아니?” 엄마의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그때 어머니의 사랑,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 지 경험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와 비슷한 부모의 사랑을 다 체험하고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 같은 부모님의 사랑을 알고 이해한다면, 부모님께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고 옳은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세요.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2.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출 20:12,
신 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잠 23: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자, 여기에 계명이라고 했어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 명령임을 우리에게 remind,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을 넘어 하나님의 법칙임을 강조합니다.
  에베소서에서 먼저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순종과 공경은 유사하면서 다른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말씀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순종하면서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죠?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기는 합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나 엄마 말씀에 동의 안 해’ 라는 생각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공경이라는 말은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이상입니다. 근본적인 자세를 강조합니다.
  본래 ‘공경’이라는 히브리어는 ‘카베드’입니다. ‘무겁다, 무게를 둔다, 무겁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즉 부모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소중하고 존중히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부모의 말을 피상적으로 따라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 그 자체를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맨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경험하는 것이 바로 우리 부모입니다. 내가 부모와 잘못된 관계를 맺으면 다름 모든 인간관계가 왜곡됩니다. 모든 다른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부모와 관계가 잘못 되었을 때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도 어렵다는 것을 아십니까? 인간관계가 편안하지 못한 분들, 따지고 들어가면 어릴 때 그 부모와의 왜곡된 관계, 그 상처가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상처가 치료되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의 모든 인간관계의 영역 속에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깊은 신앙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아직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살아가야 할 내 인생을 위해서라도, 부모와 나 사이의 관계의 새로운 정립,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생의 과제입니다. 여러분, 이제라도 부모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보세요. 이제라도 부로를 용서해 보려고 노력해 보세요. 그리고 그분들의 입장에서 그 분들의 살아온 인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비록 그분들이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 달랐어도 때로는 나에게 거칠게 나왔던 모든 행동의 밑바탕 속에서도 나를 향한 부모님의 여전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와 나 사이의 상처를 넘어선 그 관계의 재정립이 없이는 내 인생의 나머지 부분들이 주님이 기대하시는 그런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부모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도록 우리가 결심해야 합니다.

3.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축복이 있습니다.

출 20:12,
신 5:16,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엡 6: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려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셨어요. 이는 약속 있는, 즉 이런 축복이 들어있는 계명입니다. 십계명 중 이런 약속이 붙어있는 계명은 이 부모 공경, 제5계명 밖에 없습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세상에서 장수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 범사에 잘 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레는 참으로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그는 자녀를 17 명이나 두었습니다. 아무도 안 놀라시네요? 자식이 한 다스를 훨씬 넘어 17 명이라니까요? 그런데 자식들을 많이 두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17 명의 자녀들을 다 당당하게 키워냈습니다. 그들은 영국의 사회, 종교, 정치계에 영향을 끼치는 아주 아름다운 자녀들로 성장해 갔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가정을 만날 때마다 그 부인, 수잔나 웨슬레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생의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 자녀 양육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대답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세요. 그것이 내가 알고 잇는 인생 성공의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 복을 받습니다. 물론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계산적인 효도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열심히 효도하다 보면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우리가 이 땅에서 축복을 받느냐 저주를 받느냐는 부모를 공경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을 보면 효자입니다. 건강하고 오래 사는 사람을 보면 공통적으로 부모를 잘 모셨거나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장수의 축복을 원하십니까? 보약을 잘 먹는 데 있지 않습니다. 헬쓰에 가서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성경대로 오래 사는 비결을 효도하는 일입니다. 효도하는 자에게 장수의 축복을 주십니다. 이 땅에서 잘 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미국의 메리 파이퍼라는 심리학자는 말합니다. “나이든 부모에 대한 사랑은 곧 자기 미래에 사랑이다.” 그렇습니다. 노부모를 어떻게 부양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심은 대로 거둡니다.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둡니다.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둡니다. 효도를 심으면 우리 자녀들이 언젠가 우리에게 효도하는 은혜를 받습니다. 반대로 오늘 불효를 심으면 언젠가 자녀들로부터 불효를 돌려받게 됩니다.
  효도하면 장수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르 끝까지 봉양한 제자가 있습니다. 터키 에베소의 산언덕에 가면 마리아의 집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에베소에서 95세까지 살면서 마리아를 봉양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를 기록했습니다. 유배지 밧모 섬에서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95세까지 사는 정말 장수의 복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편안히 모시기 전에는 장가도 가지 않겠다고 하며 52 세에 결혼한 사람이 있습니다. 60 세에 첫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가 미국의 대재벌이었던 강철왕 카네기입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성공적인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도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자보다 불효자가 많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간적으로 노력해도 잘 안 됩니다. 순종하려면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공감이 가는 어떤 글이 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들을 추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부모에게 불효자는 없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나?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는 모든 자녀가 효자이다. 그분과 더 이상 감정적으로 얽힐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살아계신 부모님과의 관계이다. 사람들은 살아계신 부모님에 대해 미묘한 이중감정에 시달린다. 부모는 끝없이 파고들고 싶고 끝없이 찾고 싶은 고향 같은 존재이다. 그런가 하면 부모는 어떻게 하면 멀어질 수 있을까 생각하는 족쇄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살아계신 부모님들과는 감정적으로 얽힐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공감되세요. 이런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순종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상당히 부담스런 존재로 느껴집니다. 많은 자녀들이 분노하고 증오하고 섭섭해하기도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다고 그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마음의 상처 때문입니다. 많은 자녀가 부모로부터 상처를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부모에 대해 두 마음으로 갈라집니다. 순종하려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에 대해 수없이 들어도 이상하게 마음이 열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주안에서, 즉 주님의 놀라운 은혜 안에서 살 때 가능합니다.

자녀에 대한 문제도 동일합니다. 4절에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가 무엇일까요? 성경 내용을 포함합니다. 예배, 기도생활을 가르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르친다면 종교생활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에게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변화 받은 삶, 구원받고 변화받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삶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종교생활을 가르치지 않았나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남자 성도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너무 속상해요. 자녀가 말을 안 들어요. ‘머리에 이상한 색깔로 물들이고 야릇한 옷을 입고 다녀요. 집에 일찍 오라고 하면 더 늦게 들어와요. (청개구리) 어느 날 늦게 들어오는 딸과 현관에서 마주쳤어요. 용납이 안 되는 옷을 입고 있었어요. 심하게 야단을 쳤어요 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견디다 못해 그는 딸의 뺨을 때렸다. 딸의 얼굴이 굳어지고,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한 번도 예수님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는 아버지에게서 한 번도 예수님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딸의 이 말에 그는 방에 들어가 울었다. 통곡을 했다. 잠시 후,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나님 앞에 고백했다. “하나님, 예수님 모습을 갖지 못한 이 죄인을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딸의 방으로 갔다. 얼굴이 아직도 굳어 있었다. 딸은 아버지가 꾸중하실까, 야단치실까....

그런데 아버지는 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딸아, 내가 잘못 했다. 아버지를 용서해라. 너에게 예수 모습을 보이지 못한 나를 용서하라.” 그리고 울었다. 딸은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자 당황하며 놀랐다. 딸도 아버지께 무릎을 꿇었다. “아빠.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그날 처음으로 딸의 입에서 잘못 했다는 말을 들었다.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부모가 예수 믿고 구원의 기쁨, 속죄의 기쁨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 부모와 자녀 관계가 좋아야 통하는 관계가 되어야 주의 교양과 훈계가 가르쳐진다. 그래서 자녀에게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라” 하기 전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자녀가 부모에 대한 화난 마음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다 가증하게 여겨지고 말씀이 전혀 그 마음에 들어가지 않는다. 자녀 마음에 상처가 생기면 더 이상 가르친다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그때부터 마귀가 우리 자녀를 사로잡는다. 마귀가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간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 그러므로 자녀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말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주 안에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어떤 일이 생기나? 내 마음의 상처가 치료된다. 상처가 깨끗이 치료된다. 그래서 부모를 진정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사 61:1, 중간에... “나(메시야 예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부모님이나 자녀에 대한 상한 감정들을 치료해 주시길 바랍니다. 미움, 원망, 배신감, 수치심, 고통, 슬픔, 근심, 거절감 등을 깨끗이 치료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Comments